여름이 지나가는 순간, 깊고 그윽한 사색을 부르는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쉽게 다가오지 않지만 언제든지 기댈 수 있는 깊고 그윽한 소리
무더위를 견뎌낸 후 다가오는 가을의 길목, 깊고 그윽한 사색의 시간에 잘 어울리는 음악인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를 소개해 드릴려고 해요. 흔히 베토벤, 멘델스존과 함께 '3대 바이올린 협주곡'이라고 불리는 이 곡은, 브루흐나 멘델스존처럼 처음부터 우리의 귀를 사로잡지는 않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잘다져진 기초과 거대한 구조가 만들어 낸 리듬의 깊이와 소리의 무게에 빠져들게 됩니다.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은?
브람스는 친구이자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이름을 날린 요아힘을 위해 이 곡을 작곡했다고 하는데, 바이올린을 오케스트라와 대등한 위치까지 끌어올린 마치 교향곡 같은 협주곡입니다.
곡의 구성
1악장: Allegro non troppo
웅장함, 내적 갈등, 성숙한 사랑
브람스답게 웅장하고 진중하게 시작하는 오케스트라의 도입부는 구조가 단단한 거대한 건축물 앞에 서 있는 듯한 감정을 만나게 됩니다. 이윽고 서정적인 선율의 바이올린이 등장하면 솔로 악기와 오케스트라는 치열하게 씨실과 날실을 엮어나가며 하나가 되어갑니다.
2악장: Adagio
명상, 평온, 휴식
브람스라고 항상 거대하고 웅장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오보에가 선두에 서서 들려주는 2악장의 주제는 그의 서정성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예인데요, 뜨거운 열기가 사라진 늦은 오후의 따스한 햇살처럼 우리를 따사롭게 감싸기 시작합니다.
3악장: Allegro giocoso, ma non troppo vivace
헝가리 풍, 춤, 활력
브람스의 음악엔 자주 헝가리 민속음악 영향이 등장해요. 겉모습과 달리 집시 음악의 자유스러움과 활력에 마음을 준 브람스는 자신이 견고하게 쌓아올린 독일 음악의 전통에 이런 활력넘치는 리듬을 도입하여 독특하고 거대한 피날레를 완성해 냅니다.
명연주 명음반
영국의 음반 비평 전문 잡지인 gramophone에 따르면 이 인기 높은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1927년 부터 녹음이 시작되었다고 해요. 전설의 명연주자인 프리츠 크라이슬러가 1927년에 베를린 국립 오페라 관현악단과 녹음을 했는데 그 이후로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명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이 곡을 자신의 디스코그라피에 올려놓고 있습니다.
예후디 메뉴힌 /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미국에서 태어난 영국계 바이올린니스트 메뉴힌과 독일의 전설적인 지휘자 푸르트벵글러가 2차대전이 끝난 후에 열린 스위스 루체른 페스티벌에서 함꼐 이 곡을 연주한 라이브 레코딩이에요. 그라모폰지에 따르면 이 연주는 이전 시대까지 팽팽한 긴장감이 두드러지던 템포에서 한발짝 물러나 좀 더 여유를 갖고 연주한 새로운 시대의 스타일을 창조한 명연주라고 부르고 있는데, 지휘자와 바이올리니스트 각자의 개성을 고려할 떄 상당히 이색적인 연주였을 것 같아요. 하지만 엄청난 전쟁이 유럽 대륙을 휩쓸던 긴장감을 생각해 보면 1949년 평화를 되찾은 이들에게 브람스의 음악은 긴장과 대치보다는 사색과 여유로 다가왔을 듯 싶습니다.
안네 소피 무터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안네 소피 무터의 천재성을 알아본 카라얀은 어린 소피 무터와 함께 다수의 음반 녹음을 하는데 그 중에서도 이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은 완성도가 매우 높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소피 무터는 이후에 쿠르트 마주어가 지휘하는 뉴욕필과 다시 이 곡을 녹음하지만 곡의 특징을 생각했을 때 놀랍게도 어린 시절 연주한 이 녹음이 훨씬 더 구조적으로 깊이 있는 소리를 들려줍니다.
리사 바티아슈빌리 / 크리스티안 틸레만 /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구소련 연방의 하나인 조지아에서 태어난 리사 바티아슈빌리는 출신국가의 지역적인 한계 탓에 2001년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서유럽 음악계에 소개되기 시작합니다. 이후 다양한 연주활동을 펼치고 있는데, 독일 출신 지휘자로 한때는 카라얀의 후계자라고 불렸던 크리스티안 틸레만과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녹음하며 자신의 실력을 증명합니다. 독일 지휘자라는 선입견이 틸레만은 왠지 거대하고 구조적인 분석을 통해 재미없는 음악을 들려줄 것 같은 오해를 사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로 너무 로코코 스타일을 보여줄 때가 많아서 아쉬움을 사는데요, 이 음반에서는 그런 그의 약점이 오히려 협연자와 찰떡 궁합을 보이면서 새롭고 신선한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이 완성됩니다. 바티아슈빌리의 감정 풍부한 소리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를 이끌고 있는 의외로 감성적인 지휘자를 만나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의 숨겨진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마무리 - 급한 세상에 느림의 미학을 전해준다
브람스 협주곡은 빠른 것이 미덕인 현대의 도시 생활에 느리게 사는 법을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최근들어 점점 더 여유로운 템포와 깊이 있는 전개가 연주자들 사이에서 표준으로 자리잡는 것을 보면 이 곡이 갖는 메시지인 삶을 더 천천히, 그리고 더 깊이 있게 살자가 도시인에게 먹혀드는 게 아닌가 싶어요
또 브람스의 기다려주는 배려하는 사랑의 방식이 표현된 음악으로 복잡한 인간관계에 힘들어 하는 현대인에게 새로운 희망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전해 주는 것 같습니다